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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좋아, 사진에 미쳐, 이제는 운명이 되어버린 사진

기사 등록 : 2015-11-18 15:58:00

황영민 dkdna86@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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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담아내는 사진작가 신미식

 


국내 1호 여행사진작가, 아프리카 전문 사진작가, 자선활동가, 단비부대 홍보대사, 20권 이상의 책을 펴낸 저자. 모두 사진작가 신미식을 이르는 수식어다. 하지만 기자가 건네받은 명함에는 오로지photographer 신미식(申美植) Shin Mi-Sik’이라는 문구 외 그를 따라다니는 어떤 문장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를 따라다니는 모든 수식어는 오로지 사진이 좋아서, 아니 사진에 미쳐서 운명처럼 이끌린 모든 행위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가공자에서 생산자로 전직
신미식 사진작가의 일화는 2010년 발행된 그의 자전적 에세이 「사진에 미친놈, 신미식」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신 작가는 42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사진작가로 데뷔했다. 본격적인 전업 사진작가의 길에 들어서기 전 그의 직업은 잡지 편집디자이너.


사진을 편집해 지면으로 옮기는 2차 가공자에서 창작물을 생산해내는 1차 생산자로 전직한 셈이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사진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나는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했는데 한 학기 동안 사진과목을 들어야 했다. 카메라가 없는 내게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중략) 사진수업만 돌아오면 오늘은 또 누구에게 카메라를 빌려야 하나 괴로웠다. 아쉬운 소리도 한두 번이지 구차스러웠고 자존심도 상했다.” -「사진에 미친놈, 신미식」 중에서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에게 고가의 카메라를 장만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사진과 안 좋은 기억으로 인연을 맺게 된 신미식 작가. 그가 사진에 미치게 된 까닭은 일상의 단편을 아름답게 담아내는 사진의 마법 같은 매력에 있었다.


편집디자이너로 일하던 때였다. 길가에 버려진 연탄재, 냇가의 돌다리, 구름 등 일상을 담아낸 사진을 화보로 정리하며 특별하지 않은 풍경에서 감동을 느꼈던 것.


53만 원짜리 니콘 FM2 카메라를 36개월 할부로 사며 그는 생애 첫 카메라를 손에 쥐었고, 인생의 터닝포인트에 접어들었다. 여행을 좋아하던 청년이 여행사진작가의 길로 첫 발을 디딘 것이다.

 

 

 

 

사진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사진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미식 작가가 항상 독자들에게 건네는 조언이다. 이 말처럼 그는 아카데미 수료라든가 누구를 사사한다든가 등 ‘사진을 배운다’는 형식을 거치지 않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많이 보고, 또 많이 보고, 따라했다. 아는 만큼 보는 시각도 넓어진다”가 적당할 것이다. 신 작가는 한때 유명 연예인들의 화보를 촬영하는 사진기자로도 활동했다. 커리어에 초석이 된 것은 여성지 등에 나온 화보사진을 보고 배우의 포즈와 사진 구도 등을 무작정 따라 하기 시작한 것.
어느 정도 인물사진으로 유명세를 알린 다음에도 끊임없이 연구했다. 한 인물을 촬영하기 위해 600장 이상의 사진을 보며 그 사람의 매력에 대해 연구하고, 어떤 구도가 좋을지 고민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대상과 교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의 시작은 그때부터일까. 그는 지금도 단순한 풍경 사진을 찍을 때도 무작정 렌즈를 들이밀지 않는다. 어떤 때는 며칠이고 카메라를 들지 않고 사물과 그리고 사람과 교감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신미식 작가가 아마추어 사진가들과 함께 출사를 나갈 때면 하루에 딱 48장만 찍도록 권유한다. 디지털카메라가 나온 이후 사진에 대한 고민이 없어졌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한 깊은 고민과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당연한 말이겠지만, 신미식 작가의 말이기에 더욱 와 닿는 것은 평소 그가 사진을 대하는 태도와 그의 작품에서 나타난 진정성으로부터 비롯됐을 것이다.

 

 

 

 


안식과 위안의 땅, 아프리카
아프리카 전문 사진작가 신미식. 정확히 말하자면 마다가스카르 전문 사진작가로 더욱 잘 알려졌다. 신미식 작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오밥나무 너머 파란 하늘에 걸린 무지개일 정도이니.
여기서 신미식이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만 더 파고들면 그가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자선활동을 펼쳐왔는지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봉사를 목적으로 떠난 것이 아니었다. 만남과 만남을 통해 깨닫게 된 본능적인 ‘나눔’ 유전자가 발동한 것이라고 그는 회고한다.


“아마 첫 시작은 2009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우간다에서 만난 한 선교사가 해준 말이 시발점이 됐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신발을 신겨주면 유아 사망률이 25%나 줄어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신발은 공기처럼 당연한 것인데···. 당장 행동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신미식 작가는 2년간 에티오피아로 보낼 신발 1000켤레를 모았다. 아니 정확히는 신발 1000켤레를 살 수 있는 돈을 모았다. 그가 생각하는 제3세계를 돕는 방법은 그 나라의 물건을 사서 그 나라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신 작가는 공정여행이란 형태로 기금을 모아 마다가스카르에 도서관을 세우고 있다. 10월 26일 떠난 마다가스카르 일정도 두 번째 도서관을 지어주기 위함이다.


거칠고 황량한 땅에 대한 연민일까, 아니면 사진작가로서 작품촬영의 당위성을 찾기 위한 행위일까. 신미식 작가는 에둘러 표현했지만, 아마 ‘보답’일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주고, 아이들의 투명한 눈망울을 들여다보면 스스로 정화되는 듯한 안식을 얻는다.” 그에게 아프리카는 안식과 위안의 땅이자, 동경의 대상이다.

 

 

 

사진으로 부른 사모곡
‘삶의 도구전’은 신미식 작가가 최근 발표한 사진전 제목이다. 전시에 걸린 흑백사진 속 피사체들은 그의 작품 속 익숙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닌 늙고 주름진 우리네 어머니와 아버지다.


‘삶의 도구전’은 몸을 도구로 삼아 자식을 키워온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신 작가는 이번 전시를 오래간 준비해왔다고 설명한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항상 마음속에 모셔두고 있었다. 나이 오십을 넘기며 이제는 어머니를 편히 떠나보내 드리자는 마음으로 사진전을 준비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13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신 작가는 다른 형제들보다 어머니의 정을 느낄 시간이 짧았다. 할머니뻘의 어머니가 한때는 부끄럽기도 했지만, 항상 막내자식 생각뿐이셨던 어머니를 너무 일찍 떠나보내야만 했던 그는 절절한 그리움을 담아 작품을 준비했다고 한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손등, 깊게 패인 이마의 골짜기, 굳게 다문 입술 옆으로 퍼져가는 실금···. 온 몸 가득 자글자글한 주름은 자식들을 위해 몸을 도구로 삼아 평생을 일한 부모님의 흔적임을 알려준다.
신미식 작가에게 ‘삶의 도구전’은 여느 전시보다도 더욱 의미가 컸다. “전시회를 다녀간 사람들이 부모님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연락하거나 찾아뵀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느 전시보다도 더 큰 기쁨을 느꼈다.”


사진으로 전하고자 한 메시지, 부모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이 관객들에게 정확히 전달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됐다.


“전시회를 마치고 나니 ‘내가 왜 굳이 어머니를 억지로 떠나보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이 한마디뿐이었지만,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삶에 와 닿는 모든 것이 감동이다
‘감동이 오기 전에 셔터를 누르지 마라’는 신미식 작가가 볼리비아 우유니사막을 본 후 감탄에 사로잡혀 메모한 내용이다.


“어떤 분은 이 말을 듣고 1년간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하더라. 꼭 그런 의미로 얘기한 것은 아닌데.(웃음)”
지금이야 말 한 마디가 누군가의 사진관을 흔들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됐지만, 그의 과거는 매우 처절하고 힘겨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두 번의 신용불량자 경력, 그에 따른 5년간의 주민등록 말소.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제때 결혼한 친구들은 당시의 그를 모두 한심하게 바라보거나 실패한 인생으로 치부했다.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자 매일 밤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끝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그를 구원한 것은 교도소에서 온 한 통의 편지였다. 편지 안에는 세상을 원망하기만 했던 어느 재소자가 그의 저서를 읽고 새로운 인생을 살 희망을 얻었다는 감사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편지는 한 없이 추락한 그에게 내려진 동아줄과 같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선망한다는 그 책임감과 부담감은 재기의 원동력이 됐다.


“요즘 들어 1년에 열 통 정도의 이메일을 받고 있다. 수신자는 대부분 중·고등학생이며, 내용은 직업 사진작가로서의 진로에 대한 문의다. 내가 그들에게 먼저 해주는 말은‘사진작가가 되려면 돈 버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다. 내가 겪은 10년의 신용불량자 생활 그리고 결혼까지 포기할 수 있는 각오가 생기면 그때 사진작가를 하라고 조언한다.”


삶의 밑바닥부터 기어올라 세계 80여 개국을 누비는 사진작가가 되기까지의 경험이 묻어나는 말이다. 이런 시련을 딛고 일어선 그에게‘ 감동’의 깊이는 더욱 남다를 것 같지만 또 아니었다.


“예전에는 감동이라는 것이 특별한 순간에만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니 감동은 우리가 느끼는 일상의 감정과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삶에 와 닿는 모든 것이 감동 아니겠는가. 누구에게나 감동의 깊이가 다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