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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떠나도 소리는 남는다

기사 등록 : 2015-09-15 09:35:00

황영민 dkdna86@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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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이종구 옹 1주기를 맞이하며

 


 

 

2014년 8월 10일, 경기도무형문화제 제48호 평택민요 어업요 보유자 故이종구 옹이 타계한 지 1주기가 지났다. 그의 장례 마지막 날 치러진 노제에서 꽃상여에 실려 그리운 바다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데 시간은 어느새 화살처럼 흘러버렸다.

평택 뱃소리의 마지막 전승자이자, 평택민요를 통해 그 맥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한 이종구 옹을 다시 한 번 기억해본다.

 

 

 


 

 

잊혀진 만선의 꿈

 

1973년 아산만방조제가 들어서기 전까지 평택의 뱃사람들은 가까이는 행담섬부터 멀리 연평도까지 배를 타고 나아가 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왔다. 당시 고된 어업의 피로를 씻고, 만선으로 무사귀환하길 기원하며 불렀던 노래가 바로 어업요(뱃소리)였다.

 

하지만 바다가 막힌 그 날 이후 사람들은 손에서 그물을 놓기 시작했고, 평택만을 따라 흐르던 뱃소리 또한 들리지 않게 됐다. 이후 세월이 지나며 노래를 기억하는 옛 선원들이 하나둘 세상을 등지며, 평택 뱃소리는 사장될 위기에 처했었다.

 

옛 어촌 사람들도 이제는 받는 소리만 기억하게 됐을 때, 오로지 이종구 옹만이 메기는 소리까지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2007년 평택민요 채록을 위해 발품을 팔던 어영애 단장이 그를 찾아오며 사라질 뻔 했던 뱃소리는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따뜻한 뱃사람

 

흔히들 뱃사람이라고 하면 거친 파도와 맞서 싸우는 거칠고 강인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곤 한다. 배를 탄지 수십 년이 지나서도 온몸으로 소리를 기억하는 이종구 옹이라면 으레 그러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전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지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그는 매우 따뜻한 사람이었다.

 

평택민요보존회 어영애 단장이 처음 이종구 옹을 찾아갔을 때도 그는 어 단장에게 도리어 감사의 인사를 했다고 한다. 자신의 대에서 끊기는 줄만 알았던 뱃소리를 이어줘서 고맙다고….

소리를 가르치기 위해 보존회를 찾을 때도 항상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연습하며 함께 나눠 먹을 간식이나 음료 등을 직접 사오곤 했던 것.

 

“결코 상스러운 말은 입에 담지 않으셨어요. 고령에 현덕에서 평택까지 전수교육을 위해 오시는 길이 힘들 법도 한데,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셨죠.” 어영애 단장의 말이다.

가족들의 기억에 남겨진 아버지 이종구 옹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식들에게 입버릇처럼 했던 말. ‘없이 살아도 남에게 바라지 말고, 더욱 베풀어라.’ 생활의 터전이었던 바닷길이 막힌 후, 곤궁한 삶을 이어가면서도 다른 어려운 이들을 돕는데 주저함이 없었다고 한다.

이제는 남겨진 사진 속 환하게 웃는 얼굴 가득한 주름에서 따뜻했던 이종구 옹의 성품을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마지막 소리꾼의 애착

 

이종구 옹은 어업요 보유자로 기록돼 있지만, 어업요뿐만 아니라 농요와 장례요도 일가견이 있던 인물이다. 조업철이 지나 배를 타지 않을 때면 인근 노동현장에서 모셔갈 만큼 타고난 선소리꾼이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더 이상 마을에 소리가 나지 않음에도 그 기질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평택민요가 체계를 갖추며 보존회의 형태를 꾸려가자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소리를 가르쳤던 이종구 옹. 젊은 사람들도 견디기 힘든 겨울 바닷바람에도 그는 야외연습을 마다않고 회원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폐암으로 병상에 눕게 된 후에도 이종구 옹은 무대에 올라 소리를 냈다. “노래하는 순간만큼은 하나도 안 아파.” 그만큼 평택민요를 사랑한 사람이 또 있을까.

 

 

 

떠나고 남겨진 것, 보존의 필요성

 

이종구 옹의 1주기를 맞으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생전 그의 유품이 온전히 남아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발인이 끝난 후 기자는 어영애 단장과 함께 이종구 옹의 유품을 수습하기 위해 현덕면 신왕리 자택으로 찾아갔다.

 

마지막 정리가 한창이던 집에는 생전 고인의 손길이 아직 남아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애장품들은 대부분 불에 태워진 후였다. 일반적인 장례절차에 따라 진행된 것이지만, 고인의 업적과 앞으로 유품이 지닐 향토사적 가치를 생각한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몇 안 되는 유품도 현재로써는 마땅히 보존하고 시민들에게 공개할 곳이 없는 현실이다. 지금의 평택민요가 있기 까지 근근이 그 전통을 이어온 선대예인들에 대한 기억도 언젠가는 희미해질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들의 숨결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길 희망한다. 사람은 떠나도 소리가 남았듯이.

 

“에~이혀~ 에~이혀~ 강다리 털어서(어야디야) 노대도 빨고(어야디야) 고기를 몰아서(어야디야) 잡아당깁시다(어야디야) 에~이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