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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벌에 울려 퍼진 그 남정네의 쇳가락

기사 등록 : 2015-09-15 09:33:00

황영민 dkdna86@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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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최은창 탄생 100주년

 


 

 

평택농악의 초대 예능보유자이자, 현재의 평택농악보존회의 기틀을 세운 故최은창(1915~2002). 올해는 평택농악이 1985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지정 30년이 된 해이자, 1915년 6월 2일 태어난 최은창 선생의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다.

뛰어난 상쇠이자 소리꾼이며, 탁월한 리더십으로 지금의 평택농악을 만든 최은창 선생. 그의 업적과 위상은 숱한 논문과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야기들로 남아 있다.

월간『평택문화』는 평택농악을 연구한 논문과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평택농악의 상쇠, 그리고 인간 최은창의 흔적을 되짚어 봤다. 기사의 제목은 6월 20일 전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열린 최은창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명인 오마주 공연의 제목을 차용했다.

 

 

 


 

 

시대의 고사꾼 최은창

 

최은창 선생의 생애에 대한 부분은 황삼열의 ‘평택농악 원형에 관한 연구’(2007)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최은창 선생은 1915년 6월에 태어나 16세 때 마을 두레패 상쇠에게서 꽹과리를 배워 두레패의 꽹고리를 쳤다. 20세 때부터 10년간 안성의 서상현 행중에 소속돼 낭걸립을 다녔다. 26세 때에는 이원보 상쇠에게서 장고와 꽹과리를 배웠고, 이원보 농악단의 끝쇠를 쳤다. 40세 때에는 남운룡농악단에 들어가 장구를 치다가 부쇠를 쳤으며, 48세 때에는 절 걸립패 상쇠로 나서 수많은 절의 중수에 절 걸립패를 이끌고 시주를 걷었다. 이후 농악단의 상쇠를 치며 각종 농악경연대회에 입상을 했다.

 

이렇게 평택농악의 탄생을 이끌어낸 최은창은 마을 두레패에서 시작해 절 걸립을 위주로 한 전문 농악인으로 성장하게 되지만, 농사철에는 평궁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추수를 끝낸 후에는 걸립패로 나서는 두레패와 전문연희패의 생활을 같이 해나갔다.

 

평택농악이 경기·충청지역을 대표하는 농악으로써의 대표성을 가지는 것은 이렇게 두레농악의 전통과 전문연희패의 성격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최은창 선생은 고사꾼으로도 명성이 높았는데 전문연희패 활동 중 절 걸립의 비중이 높아서 전국적으로 북한산 태고사(7년), 여주의 묘연암(3년), 인천 연화사(3년), 영등포의 통일사(1년), 서울의 약수암과 적조암(1년) 등 사찰의 중수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화와 사회화로 요약되는 사회구조의 변화는 걸립패의 생존기반을 무너뜨려 하나둘 사라지게 됐고, 단출한 인원과 불교의 후광까지 가지고 있던 절 건립마저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여파로 사라지게 된다.

 

비록 걸립패의 맥은 끊겼지만 당대의 고사꾼으로 시대를 풍미했던 최은창 선생의 존재로 인해 평택농악은 여타 지역의 농악들에 비해 고사덕담이 월등히 발달했고, 이런 연유로 평택농악이 걸립패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택농악의 설명할 때 두레농악과 전문연희패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특수성을 먼저 들곤 하는데, 그 이유는 평택농악의 성격 자체가 최은창 선생의 생애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최은창 선생의 고사소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해 당시에도 “고사 잘하기는 최은창이요. 돈 잘 뺏기는 김복섭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생전 평택농악전수관에서 보존회원들과 함께

 

 

평택농악의 기틀을 세우다

 

최은창 선생이 평택농악보존회를 만들게 된 과정 또한 황삼열의 논문을 통해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의 ‘평택농악보존회’의 유래는 마을두레패로 또한 절 걸립패로 활동하던 최은창 선생이 한국전쟁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는 농악경연대회에서 당시 마을두레패와 같이 활동하던 전문연희패의 인원을 모아 ‘평택농악’이라는 명칭으로 참가, 우승을 하면서 부터다.

 

이때부터 최은창 선생은 각종 대회에 ‘평택농악’ 또는 ‘경기농악’의 이름을 걸고 참가하게 됐다. 1980년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다시 한 번 전문연희패와 두레패 사람들로 구성된 농악단을 구성해 참가해 특별상을 받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1985년 ‘평택농악’의 이름으로 최은창(상쇠), 이돌천(벅구, 법고)이 기능보유자로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받게 된다.”

 

이처럼 최은창 선생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국가지정무형문화재 11-2호 평택농악은 어쩌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 최은창

 

이상이 문헌에 기록된 최은창 선생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기억 속 최은창 선생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월간 『평택문화』 2014년 11월호 ‘평택농악 특집’에서 다룬 평택농악보존회원들의 최은창 선생에 대한 회고 인터뷰를 다시 살펴봤다.

 

김일성, 독불장군, 호랑이선생님. 모두 최은창 선생을 지칭했던 말들이다. 이 대목에서 최은창 선생은 강한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지녔던 인물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최은창 선생과 유독 각별한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종합하면, 고인은 전형적인 외강내유(外剛內柔)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과자를 사준다는 최은창 선생의 회유에 평택농악에 입문한 이수자 김종수(44)씨는 “마치 친할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회고했다.

“제가 무동으로 처음 평택농악에 들어왔을 7살 무렵에는 구성원들 대부분이 동네 형, 동생이고 할아버지, 아저씨들이었어요. 특히 제 또래들은 최은창 할아버지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연습이 끝나면 밥을 차려주셨거든요.”

물론 가르침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엄격했던 최은창 선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연습 중 상모가 잘 돌아가지 않을 때면 손수 상모를 뜯어 고쳐주곤 했다는 김종수씨의 증언을 통해 최은창 선생의 따뜻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평택농악보존회 전수교육조교인 황영길(48)씨와의 일화를 통해서도 인간 최은창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선생님은 가르칠 때 혼자 연주하시고는 들었으면 알아서 쳐 봐라 하는 식이셨어요. 옛날 어르신들의 가르치는 방식이 다 그랬죠. 저는 처음에는 선생님이 구음을 못 하시는 줄 알았을 정도니까요. 제가 칠판에 하나하나 적어가며 가르치자 ‘야! 너처럼 가르치면 세상에 풍물 못 칠 놈이 어딨냐!’ 하셨어요.(웃음)”

최은창 선생의 교육방식이다. 한 번 가르쳐주고 따라오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때문에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별명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터. 하지만 황영길씨의 회고에서도 최은창 선생의 숨기고 싶었던(?) 사람냄새 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이것저것 말을 많이 하지도 않으셨고, 대놓고 칭찬하는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사모님을 통해 들은 여기로는 댁에서는 제 칭찬을 많이 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강한 카리스마와 동시에 내재된 인간적인 모습, 최은창 선생이 평택농악보존회를 만들고 오랜 기간 이끌어 올 수 있었던 리더십의 정체였다.

 

평택농악에는 사람이 있다

 

지난해 11월호 특집기사의 기획 꼭지 중 하나의 제목이다. 당시에는 단순한 회원명부 나열에만 그쳤지만, 기획의도는 달랐다. 우리가 인식하는 평택농악과 평택농악보존회를 넘어, 그 안에서 단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이름을 기억하자는 취지였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선대 예인들. 이돌천(법고 기능보유자, 1919~1994), 방오봉(장고 전수교육조교, 1919~2010), 정한모(북 이수자, 1928~2004), 유준(북 이수자, 1936~2013), 이성호(상쇠 전수교육조교, 1940~2005), 이세진(장고 이수자, 1942~2004), 이경일(법고 전수교육조교, 1945~2007).

모두 평택농의 한축을 이루고 최은창 선생과 함께 시대를 풍미했던 예인들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국가지정무형문화재이자 자랑스러운 유네스코 지정 인류무형문화유산 평택농악이 지켜질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이름이 후대에도 기억될 가치는 충분하다.

 

소사벌 뜰에서 시작돼 전국 곳곳에 퍼졌던 그 남정네들의 가락은 지금도 후대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