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닫기
뉴스
ㆍ정치
ㆍ경제
ㆍ사회
ㆍ문화
ㆍ체육
ㆍ특집
경기평택TV
ㆍ동영상
최해영 토론방
ㆍ주간이슈
ㆍ이슈토론
공연/전시
ㆍ정치
ㆍ행정
ㆍ사회
ㆍ교육
ㆍ문화
ㆍ항만/경제
ㆍ기획
ㆍ우리동네
ㆍ카드뉴스
ㆍ사설
ㆍ기고
ㆍ수석교사와 함께
ㆍ이창언 교수의 갈...
박기철의 중국
ㆍ오늘의 중국
ㆍ중국이야기
ㆍ박기철의 세상보...
평택저널
ㆍ음악
ㆍ미술
ㆍ문학
ㆍ사진
ㆍ연극
ㆍ건축
ㆍ동영상
평택항
ㆍ행사정보
ㆍ시민단체
ㆍ문화공간
ㆍ통복시장
ㆍ요람기
ㆍ동호회
ㆍ이모저모
ㆍ건강
남북 한마당
평택정치
ㆍ국회
ㆍ평택시장
ㆍ경기도의회
ㆍ평택시의회
ㆍ이슈토론
동영상
커뮤니티
ㆍ독자게시판
ㆍ공지사항
ㆍ자유게시판
ㆍ지난호 pdf
ㆍ평택문화 안내
ㆍ기자 게시판
ㆍ설문조사

평택배의 유래 설화

기사 등록 : 2015-07-08 14:21:00

권유진 kwonnew0101@naver.com

  • 인쇄하기
  • 스크랩하기
  • 메일 보내기
  • 글씨 확대
  • 글씨 축소
트위터로 기사전송 페이스북으로 기사전송 구글 플러스로 공유 카카오스토리로 공유 네이버 블로그로 공유 네이버 밴드로 공유
배다리 처녀와 총각의 사랑

 


 

 

따뜻한 봄이 되면, 평택은 배나무마다 열린 새하얀 배꽃(梨花)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고결함과 순수함, 청초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배꽃은 예로부터 백의민족인 우리 조상들이 가장 사랑하던 꽃이기도 했다. 소사벌 택지 지구로 개방되고 있는 평택시 모산골 인근 배다리 방죽에는 이 배꽃과 관련한 한 연인의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평택시 칠원리에서 쌍용자동차 회사를 지나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모산골’이라는 아름다운 마을이 나온다. 이 곳에서 큰 길을 건너면 오래된 저수지 ‘모산골 방죽’을 만날 수 있다. 마을의 담장을 끼고 바로 돌면 배다리 방죽에 이른다. 평택이 배로 유명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 배다리 방죽 유래설화에서 시작한다.

 

 

오래전 옛날 평택에 도둑이 떼로 몰려왔다. 안성천 갈대밭을 불태우며 통복천을 따라 오늘날 평택 시내 쪽으로 휩쓸고 들어온 이들은 평화롭게 살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도둑 떼에게 쫓긴 마을 사람들은 지금의 동삭동 북쪽 모산골 고개 쪽으로 몰리고 만다. 고갯길에 마을 사람들을 모두 몰아넣은 이들은 마을의 예쁜 처녀 한 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마을 사람들은 더 많은 재물을 주겠으니 그 조건을 포기해달라고 사정 했지만, 도둑 떼는 막무가내로 처녀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막상 누구도 내 딸을 내놓겠다고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시간이 지체되자 도둑 떼는 마을을 불 지르고, 마을 사람들 모두를 죽이겠다고 결박해 끌어내기 시작했다. 연기와 울음소리가 뒤덮은 마을은 지옥과도 같았다.

 

“기다리세요.”

 

바로 그때 한 처녀가 도둑 떼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가겠어요. 내가 잡혀 갈 테니 우리 마을에는 손끝하나 대지 마세요. 당장 마을사람들을 모두 풀어주세요.”

 

도둑 떼는 그녀의 고함과 당찬 용기에 놀라 마을 사람들의 결박을 풀고, 급히 불을 끄기 시작했다.

용감한 이 처녀는 마을 산모롱이의 조그만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눈먼 봉사 아버지와 앉은뱅이 어머니는 가난한 형편에도 어린 딸을 바르고 떳떳하게 키워왔다.

 



 

도둑 떼는 빼앗았던 마을 사람들의 재물을 다시 돌려준 뒤 마을 어른들에게 여러 번 사과했다. 예쁜 가마 한 채를 구한 그들은 처녀를 태운 뒤, 자신들의 소굴로 향해 떠났다.

 

떠나가는 가마를 보며 그 누구보다도 슬퍼하던 한 총각이 있었다. 얼마나 슬피 우는지 그가 흘린 눈물은 마을 내 들풀을 모두 적셨다. 그는 부모, 형제도 없이 홀로 마을의 허드렛일을 도우며 착하게 살아가던 청년이었다.

 

사실 그와 처녀는 서로를 사랑하던 연인이었다. 연인을 잃은 청년은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을 만큼 슬픔에 잠겼다. 이후 그는 처녀의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기로 마음먹었다. 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며 딸을 잃은 부모님을 보살펴 드렸다. 그리곤 연인이 그리울 때마다 홀로 방죽가로 나가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밤 중에 배다리 방죽에서 온 몸이 푸른빛 비늘로 번쩍이는 천년 묵은 이무기 한 마리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저기 쪽박산이 보이지? 저산이 통복천의 물길을 가로막아 모산골 방죽에 살고 있는 내 아내 이무기를 만날 수가 없어. 저 쪽박산을 옮겨다오. 그렇게 해준다면 사랑하는 너의 연인을 데려다 주겠다.”

 

그 날부터 그는 3년 동안 쪽박산의 흙을 등짐으로 퍼 날랐다. 변함없는 총각의 노력에 마침내 통복천을 가로막고 있던 쪽박산이 옮겨지고, 통복천의 물길이 뚫려 두 이무기가 만날 수 있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다시 만난 두 이무기가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는 바람에 일어난 물결의 소용돌이가 백여 길이 넘었고, 연 이레 동안 모산골 방죽과 배다리 방죽의 물결들이 춤을 추었다고 한다.

 

 

 


 

 

약속대로 이무기는 단숨에 멀리 떠나 있던 처녀를 데려왔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도둑 떼 두목의 부인(또는 일본 임금의 왕비)이 돼 있었다. 수많은 시녀들을 거느리고 호위병에 둘러 싸여 돌아온 그녀의 모습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눈물지었다.

 

슬픈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연인을 그리워했던 총각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쪽박 산을 옮긴 그 일이 너무나 힘들었던 탓인지 총각은 그만 병이나 처녀가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처녀는 오두막집을 찾았다.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양지 토방마루에는 어렸을 때 신던 짚신과 꽃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총각이 그녀를 그리워하며 정갈하게 닦아놓은 것이다. 방에 들어가 보니 총각이 아침저녁으로 부모님 영혼 앞에 향불을 피우고 절을 하며 상식(죽은 이의 영혼에게 드리던 음식)을 올리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슴이 메어오는 서러움을 삼키며 그녀는 총각의 오두막으로 발길을 돌렸다. 무성한 잡초 사이로 고개를 내민 빨간 채송화의 모습을 보고 마침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처녀의 울음은 온 마을을 슬픔에 휩싸이게 했다. 그녀가 지나가는 길의 모든 꽃과 풀, 나무들이 시들었고, 하늘을 날던 새들도 모두 날개를 접고 숨어버렸다.

 

일관(점을 치는 일을 맡은 사람)은 죽은 총각의 가슴에 맺힌 한 때문에 그 영혼이 하늘에 떠돌고 있다며 천도제를 지내서 그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천도제를 지내기 위해 총각의 무덤을 찾았다. 사흘 밤낮을 마을의 들과 산등성이를 샅샅이 뒤진 결과, 쑥국새 한 쌍이 둥지를 튼 골짜기에 누워있는 총각의 시신을 찾았다. 돌봐주는 사람 없는 한적한 계곡에 무덤도 없이 누운 총각은 아직 못다 한 처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자는 것처럼 생생한 모습이었다. 처녀는 사람들을 시켜 그의 시체를 옮기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이후 처녀는 마을 노인들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속옷과 치마를 벗어 시체를 고이 싸고 술 석 잔을 부어 올리고는 말했다.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이니 어찌하겠습니까. 노여움도 서러움도 모두 푸시고, 이제 그만 극락으로 가십시오. 이 몸도 이생의 서러운 인연들을 모두 마친 후 당신을 찾아 가겠습니다.”

 

처녀의 말이 끝나자 꼼짝도 하지 않던 총각의 시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모산골 고개 아래 양지 바른 곳에 그의 무덤을 마련하고 안성 칠장사 스님을 모셔다가 정성껏 천도제를 올렸다.

 

천도제를 올린 처녀는 총각의 무덤가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기다리다 못한 도둑 떼의 두목은 어서 돌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올 수 없는 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녀가 길을 떠나니 때 아닌 비가 하염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배다리 방죽의 물결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흘린 눈물은 마침내 마을의 풀들을 적시고 나무뿌리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시들었던 식물들이 차츰 다시 살아났고, 숨어버린 새들도 지저귀기 시작했다. 마을에는 다시 평화와 행복이 넘치게 됐다. 그해부터 소사벌의 산과 들판에는 하얀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전설에 따르면 처녀의 속옷 색깔이 마치 눈처럼 희어 그 때문에 하얀 배꽃이 소사벌에 가득하게 피어난 것이라고 한다. 그 해 가을, 집집마다 탐스러운 배들이 주렁주렁 열렸다. 평택배가 유명해진 것은 이때부터라고 전해져 내려온다.